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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2020년 7월 6일(월) - 11일(토)

작성자
김 재형
작성일
2020-07-05 16:33
조회
48
가정예배 2020년 7월 6일(월)

제목: 부르짖음(시 130:1-8) 찬송 543(새 491)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계보가 등장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구백년이 넘은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삶은 ‘...죽었더라’는 것으로 끝납니다.
‘죽었더라’가 아담으로 시작된 모든 인류의 결론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실체를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의 원인이 죄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피조물의 절망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130편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말한 깊은 곳은 3절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고 말한 것을 보면 죄의 깊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깊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로 가득한 자신의 실체를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어둠의 세계로 바라보면서 주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어둠의 세계에 갇힌 자신에게 희망은 오직 주되신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고 말하는 것처럼 주되신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시고, 어둠의 세계에서 건져낼 수 있음을 알고 주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에 갇힌 채 헤어날 수 없는 자신의 모습를 알고, 사유하심이 오직 주께 있음을 알게 된 시편 기자는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한 심정으로 주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파수를 서고 있는 사람에게 아침은 편한 쉼, 안식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안식은 7절에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인자와 풍성한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의 구속은 생명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것 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가정예배 2020년 7월 7일(화)

제목: 평온(시 131:1-3) 찬송 478(새 419)

1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눈이 높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내용으로 받아들여 지는데, 큰 일과 기이한(놀라운) 일을 힘쓰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께 맡기면 주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크고 놀라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큰 일을 하여 자신을 돋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1절에서 마음의 교만과 눈의 높아짐(오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은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에서 평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심령의 고요와 평온의 상태를 어머니의 젖을 먹고 배가 불러서 젖에서 입을 떼고 품에 안겨 잠을 자는 아이로 표현합니다.
부족함이 없고 목마름이 없는 족함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평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피조물인 인간을 바라보게 되면 인간이 이룬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 앎이 우리를 평온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마음을 두십시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 덕분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이 행하신 일만을 바라볼 때 우리 심령이 평온할 것입니다.


가정예배 2020년 7월 8일(수)

제목: 신앙의 핵심(시 132:1-18) 찬송 512(새 315)

132편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가져온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생활을 했고 왕이 된 후에는 전쟁을 하느라고 언약궤를 돌보지 못하다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비로소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때 법궤에 대한 다윗의 심정을 말한 것이 1-6절의 내용입니다.

다윗은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않고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눈으로 잠들지 아니하며 전능자의 성막을 찾아 다녔습니다.
즉 성막에서 가장 중심인 법궤를 발견하기 위해 집에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찾았던 것입니다.

7-9절을 보면 다윗이 언약궤를 발견했을 때 그 앞에 엎드려 예배하고 ‘여호와께서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라고 기원을 합니다.
다윗이 말한 평안한 곳은 다윗 성, 즉 시온 성을 말합니다.

시온성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네 후손이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는 언약을 하신 곳입니다(11,12절).
하나님의 언약은 단지 다윗 가문의 번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의 뿔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사람들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다윗의 뿔이 오기를 기다리며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제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사람들이 다윗의 뿔이 오심으로 인해 누릴 복을 사모하며 살았다면 우리는 다윗의 뿔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그분의 영광의 나라로 부름 받은 복의 세계를 누리는 자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기쁨과 영광이 우리 마음에 살아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한 의의 영광보다 이 땅의 영광에 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복이며 영광이고 기쁨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할 수 있기 원합니다.


가정예배 2020년 7월 9일(목)

제목: 연합하여 동거함(시 133:1-3) 찬송 278(새 220)

다윗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다”고 표현합니다.

아론의 수염에 기름이 넘쳐흐른다는 것은 제사장 직분을 위임받는 모습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복을 누리게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제사장 누구도 온전히 그 역할을 행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스스로 제물이 되시고 자신을 버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벧전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택하신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이 행하신 제사장의 직분에 참여하게 된 사람이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기이한 빛, 즉 생명에 들어가게 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된 성도는 형제를 심판하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화목하게 하신 복에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제 관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 선하고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는 구절도 선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헐몬 산은 아주 높은 산으로 꼭대기에 있는 눈이 증발하여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유다에 이슬로 맺힌다고 합니다.
유다 땅에서 이슬은 곡식이 자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헐몬 산은 은혜의 산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하는 그 관계를 형제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 관계로 모인 자들이라면 오로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을 생각하며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만 마음을 집중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생의 복이 있습니다.


가정예배 2020년 7월 10일(금)

제목: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3) 찬송 87(새 87)

13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마지막 시편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이 성전입니다.
제사는 성전에서만 가능했고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찾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성전에 나와 제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1절을 보면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합니다.
밤에도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해 수고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것이므로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 자체를 복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합니다.
송축의 근거가 성소의 하나님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소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가 성소라는 뜻이 아니라 성소의 참된 의미인 제사를 통한 구속 사역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인자, 자비, 도우심과 지키심 등 모든 것은 온전한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라고 합니다.
시온에서 복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제사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모두가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들어 놓으시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 되게 하기 위해 일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우리에게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았던 고통과 어려움도 궁극적으로는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깨닫게 된다면 성도는 주어진 환경과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의 복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송축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는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가정예배 2020년 7월 11일(토)

제목: 특별한 소유(시 135:1-21) 찬송 28(새 28)

4절에 보면 ‘특별한 소유’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해 야곱 곧 이스라엘을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노력이나 의지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의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진정한 기적은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이나 홍해를 건넌 일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일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됨을 증거하는 사건들일 뿐입니다.

135편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찬양은 나를 소유로 삼으신 하나님의 기적이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주의 소유가 된 것만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성도의 찬양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는 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하나님을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서의 이름이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여호와의 일 전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여호와의 이름에 포함된 일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소유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소유로 삼으신 것은 그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케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을 4절에서 “자기를 위하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의 찬양을 위해 소유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입니다.

특별한 소유이기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세우시고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인자와 자비를 찬양하고 감사하게 함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소유 삼으셔서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할렐루야’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있는 성도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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