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가정예배 2020년 7월 13일(월) - 18일(토)

작성자
김 재형
작성일
2020-07-12 16:39
조회
37
가정예배 2020년 7월 13일(월)

제목: 감사하라(시 136:1-26) 찬송 429(새 379)

대개의 신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쉬운 문제로 생각합니다.
사실 세상적인 시각에서 삶을 바라본다면 감사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는 생명의 문제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을 놓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참된 감사가 상실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을 생각한다면 육신을 이롭게 하는 것보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에 온 마음을 두게 될 것이고 감사의 내용 또한 세상일 보다는 생명의 문제로 깊어 질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수준에서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육신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연관된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심을 둘 때 성도는 전혀 새로운 감사의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감사하라’는 문구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본문 역시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기자는 감사하라고 하면서 감사해야 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으로 증거합니다.

우리는 무의미하고 우연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을 간섭하시면서 악한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여 인도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과 일하심 안에 있는 것이 성도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곧 감사의 본질인 것입니다.

136편에서 중심 내용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인자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인자함에서 벗어난 적이 없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시각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인자와 어긋나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시각에서 보게 되면 그 또한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열심히 믿으면 복 받는다’는 종교 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 세계에서는 범사에 감사가 가능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앙 세계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 차이를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23절에 보면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기억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천한 처지에 있음에도 기억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때문에 기억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택한 자기 백성이라는 것 때문에 기억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실존은 비천하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를 누려도, 거지 나사로처럼 살아도 비천의 실존은 동일합니다.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해도 모든 인간은 비천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를 비천에서 건져주실 하나님의 구원만을 가장 복된 사건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인자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천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 중 어느 하나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거저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더 갖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성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예배 2020년 7월 14일(화)

제목: 예루살렘을 기억함(시 137:1-9) 찬송 383(새 336)

1절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강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나라 잃은 슬픔에 울고 있는 모습입니다.

2절에서는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었다고 말합니다.
수금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하는 악기인데 그것을 버드나무에 걸었다는 것은 노래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권력자들이 잔치를 즐기면서 유다 포로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망하고 포로가 된 유다를 조롱하기 위한 의도입니다.

그래서 기자는 노래 부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노래를 불러주어 육신의 편안함을 구하기보다는 고초를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5,6절에서는 예루살렘을 잊어버릴 바에는 차라리 오른손으로 수금을 탈 수 없게 되는 것이 낫고, 노래를 부를 수 없도록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시온, 즉 예루살렘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을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온에서 베풀어지는 여호와의 은총을 기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은총을 잊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고 합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짓밟은 것처럼 바벨론을 철저히 짓밟고 무너뜨린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사 13:16).
이것을 보면 기자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억하고 자신의 처지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힘이 되어 두려움 없이 노래 부르는 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육신이 처한 현실은 바벨론에서의 고통이지만 하나님이 이루실 참된 현실은 바벨론의 멸망과 유다의 회복임을 바라본 것입니다.

말씀이 마음에 기억되어 있는 성도에게 현실은 하나님이 이루실 말씀의 세계이지 육신이 처한 환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이 여러분의 심중에 기억되고 말씀을 이루실 하나님만 신뢰하기 바랍니다.


가정예배 2020년 7월 15일(수)

제목: 신들 앞에서(시 138:1-8) 찬송 512(새 315)

138편은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이상한 것이 ‘신들 앞에서’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신적인 자리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있습니다.
한 예로, 돈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돈은 이미 신적인 존재입니다.
신들 앞에서라는 말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외에 신처럼 섬기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도 다른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애굽에서 구출하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신은 하나님 한분뿐이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이 신처럼 여기고 의지하는 신들 앞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돈 때문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현실에서 돈과는 무관한 채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만으로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1절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은 신들 앞에서 주께 감사하지 않고 찬송하지 않는 우리의 실상입니다.
하나님만을 신이라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 우리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상을 인식할 때 2절의 말씀처럼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와 성실은 성전을 향한 예배와 연관됩니다.
성전을 향한 예배는 거룩한 제물의 피로 인해 인간의 죄를 덮으시는 인자와 자비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렇다면 감사와 찬송은 세상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자신의 악함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는 돈도 권력도 아니라 나의 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예배 2020년 7월 16일(목)

제목: 전지전능, 무소부재의 하나님(시 139:1-24) 찬송 444(새 390)

본문 1-4절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고 5-10절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한 죄도 감출 수 없다는 생각과 그 죄로 말미암은 두려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본질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인간에게서는 아예 선이 나올 수 없다고 규정하신 것을 생각하면 본문에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신다는 표현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떤 관점에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일까요?

다윗은 6절에서 하나님의 지식이 기이하고 높아서 자기가 미치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면 우리에게 진심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도 아실 것이고, 우리를 어떻게 간섭하셔야 생명의 길로 가게 될 것인가도 아실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지식을 기이하고 높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이처럼 기이하고 높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 계시고 음부, 즉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해도 거기 계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의 손으로 인도하시고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드신다고 합니다(10절).
결국 우리는 어디에 있든 늘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인도 받고 있고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다스림과 간섭이 없이 우리 뜻대로 산다면 필연코 우리는 생명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뜻은 항상 생명을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다스리시고 간섭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생명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예배 2020년 7월 17일(금)

제목: 악인에게서 건지소서(시 140:1-13) 찬송 349(새 214)

본 시는 다윗이 자신을 해하고자 하는 세력으로 인하여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시입니다.
이러한 시를 대할 때 다윗이 겪는 상황과 우리의 삶이 동일하지 않다고 생각되기에 다윗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에 참예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겪고 있는 상황을 단지 육신의 문제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왕이 된 다윗을 해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다윗을 택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상황은 오늘 우리의 상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거저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악한 세력은 이것을 훼방하기 위해 하나님이 부르신 자를 미혹하여 흔들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성도는 다윗과 동일하게 악한 세력에 의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악인의 활동을 ‘중심(마음)에 해하기를 꾀한다’고 표현합니다.
마음속으로 해하기를 꾀한다는 것은 악이 그 마음에서부터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악이 권세로 자리하고 작용하여 늘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해 매일 모이고 그 혀나 입술의 독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선이 아니라 악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러한 악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고, 우리 자신도 그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될 때 성도에게는 이 같은 현실이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다윗의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강포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라는 간구가 우리의 간구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예배 2020년 7월 18일(토)

제목: 기도(시 141:1-10) 찬송 367(새 341)

141편의 다윗은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다.
9절에서 올무와 함정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자신을 해하려는 악한 자들로 인해 억울한 일을 겪는 힘든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호와여 제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1절)라고 기도합니다.

1절의 내용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속히 오셔서 자신을 힘든 형편에서 구해달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힘든 현실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달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있기를 원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다윗은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분향과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만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분향과 제사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기도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처한 힘든 형편이 나아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자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기에 하나님께 자기의 입술을 지켜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3절).
언제든지 자신의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질 수 있고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4절).
그래서 다윗은 주께 피한다고 하고(8절), 자신을 지켜 주셔서 올무와 함정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9절).

고난에 처한 성도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성도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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