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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2020년 8월 3일(월) - 8일(토)

작성자
김 재형
작성일
2020-08-02 18:39
조회
1075
가정예배 2020년 8월 3일(월)

제목: 다른 세대(삿 2:6-10) 찬송 147(새 149)

세상은 사람을 세대로 구분을 합니다.
세대란 단순히 나이를 기준으로 해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통할 수 없는 단절된 관계를 말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달라서 서로 교제가 되지 않습니다.

10절에 보면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세대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일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행하신 일을 아는 자들과 알지 못하는 자들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대간에 단절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무엇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고 필요가 되는가?'를 따질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세대의 시각입니다.

반면에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아는 세대는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이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대는 여호와의 일이 성취됨으로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가 모르는가로 구분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안다면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삶의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그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그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피 흘리며 못박힌 십자가에는 우리의 죽음과 생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자리는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신 자리이고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담당하신 자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정예배 2020년 8월 4일(화)

제목: 사사(삿 2:11-23) 찬송 421(새 37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면서 범하는 가장 흔한 실수가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계획, 언약 등을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은 다 무너져 버리고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맞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행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 성경을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은 되어질 결과에 자기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가지가 버려져야 하는데 그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본문의 11-13절을 보면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다른 세대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바알을 섬기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이득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사방의 대적의 손에 붙여서 노략을 당하게 하시고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사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내십니다.

사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사를 단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운 사람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구원이 목적이라면 이스라엘에게 괴로움을 안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사를 세우심은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책망하시기 위함에 있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에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사를 세움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에게도 사사가 필요합니다.
말씀을 대할 때마다 여러분의 죄가 책망을 받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이끌림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예배 2020년 8월 5일(수)

제목: 가나안 전쟁(삿 3:1-6) 찬송 395(새 34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주변에 남겨두신 이유는 가나안 백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겠다는 의도이십니다.
시험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하나님의 확인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우리가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과연 진실된 것이고 참된 것인가를 증거하고 확인하는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진실된 것인가를 확인하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진실된 믿음이라면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이란 쫓아내야 할 족속일 뿐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풍족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덕분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나안 속에 이스라엘을 집어넣으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게 하셔서 참된 복은 세상에서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됨에 있다는 것을 증거 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심으로써 이스라엘은 두 방향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는 말씀보다는 자신의 삶에 득이 되는 것을 쫓아가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삶에 비록 손해가 있다 할지라도 말씀이 명하신 대로 쫓아가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가의 여부가 하나님이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심으로써 확인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삶 역시 전쟁입니다.
믿는 자로서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거하며 산다는 것은 곧 전쟁을 의미합니다.
돈으로 살아가고 힘을 의지하고 사는 세상 속에서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로 감사하며 살아가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과 하나님의 용서의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무엇이 진짜 복이며 생명인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가정예배 2020년 8월 6일(목)

제목: 잊어버림(삿 3:7-11) 찬송 512(새 315)

7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가나안 땅에 살게 되었는지, 가나안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바른 신앙의 길이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증거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게 된 것은 이방인의 손에 그들을 붙이신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도록 만드시고, 사사를 세우시고, 사사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하시고, 이방인을 사사의 손에 붙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되었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를 징계해서라도 성도로서의 길을 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은혜가 생각나는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자랑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며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성도는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로서 구원을 보여주며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 부름을 입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예배 2020년 8월 7일(금)

제목: 왼손잡이(삿 3:12-25) 찬송 356(새 216)

15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또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모압을 강성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사사 에훗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에훗을 그냥 에훗이라고 말하지 않고 왼손잡이 에훗이라고 소개합니다.
굳이 에훗을 왼손잡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나라도 예전에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의 구별이 심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오른손잡이가 정상이고 왼손잡이는 비정상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오른손이라는 것은 ‘구원의 힘’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시 18:35절에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오른손에 구원의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 우편을 구원의 능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이 구원자를 세우시는데 그가 왼손잡이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볼 때 비정상적인 사람이 구원자로 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왼손잡이를 구원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왼손잡이임을 밝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왼손잡이인 에훗에 비하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그 정상적인 오른손으로 기껏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던 것밖에 없었던 이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왼손잡이가 필요합니다.
힘들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하고 충성된 자라고 하는 교만에 빠져 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할 왼손잡이가 필요한 것입니다.


가정예배 2020년 8월 8일(토)

제목: 강함(삿 3:26-31) 찬송 384(새 585)

엡 1:23절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고,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란 이미 그리스도로 충만되었기 때문에 부족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끊임없이 부족을 느끼고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발버둥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로 사는 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세상에서 구원받게 된 것으로 감사합니다.
멸망의 세상에서 구출된 자로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만으로도 얼마든지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고 불만이 없는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말하되 그리스도로 살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구원받는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현실에서 구원받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삽니다.
돈이 없는 현실에서의 구원, 직장이 없는 현실에서의 구원, 일이 잘 안되는 현실에서의 구원을 원하며 그리스도를 찾기 때문에 항상 부족을 느끼면서 그리스도에게 뭔가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31절에서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소 모는 막대기는 결코 무기라고 할 수 없는 약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소 모는 막대기를 든 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만이 강하신 분임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강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강하신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내가 강해질 필요가 없음을 깊이 깨닫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만이 느낄 수 있는 신앙의 참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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