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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2022년 6월 3일(금)

가정예배
작성자
김 재형
작성일
2022-06-02 16:37
조회
927
제목: 애통(눅 23:26-31) 찬송 471(새 415)

예수님 가까이에는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울음에 대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합니다.
여인들이 우는 이유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여인들은 지금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비참한 모습으로 인해 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정이며 감상적인 눈물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저주의 길입니다.
그 저주는 애당초 우리가 짊어져야 할 죄의 값이었습니다.
그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보면서 그 비참한 모습에 동정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에 속한 자신의 비참함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들을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부르시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21:20절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것으로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고 있는 것 자체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부르시는 것은 ‘너희가 멸망에 속한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멸망에 속한 자로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과 자식을 위해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주에 속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로 인해 애통해 할 수 있어야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누구시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라는 죽음의 길로 가신 예수님에게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회개의 눈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저주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로 인한 울음, 즉 애통함이 있어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을 저주에서 건지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복된 사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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