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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2021년 1월 5일(화)

가정예배
작성자
김 재형
작성일
2021-01-04 18:40
조회
1902
제목: 중보자와 대속물(욥 33:19-28) 찬송 137(새 251)

엘리후는 욥의 고난을 교육을 위한 것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후도 욥과 친구들처럼 인간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틀을 벗지 못한 것이 엘리후의 한계이며 우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19-22절에서 육신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그의 생명이 죽음에 가까워지는 고난도 우리를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결과는 삶의 회복이라고 합니다(25,26절).

엘리후가 23절에서 중보자(해석자)를 언급합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계신 분입니다(딤전 2:5).
그런데 엘리후가 말하는 중보자는 일천 천사 중의 하나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정당한 길을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즉 엘리후가 말하는 중보자는 하나님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 인간에게 길로 존재하는 중보자가 아니라 옳은 길을 보여주기 위한 중보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보자가 보여주는 옳은 길을 따라 가면 삶이 회복된다는 것이 엘리후의 중보자 논리입니다.
이러한 중보자 이해는 인간의 행위를 기반으로 한 인간 중심의 사고입니다.

또한 엘리후는 대속물을 하나님이 욥을 불쌍히 여겨 살려주기 위한 것으로 말합니다(24절).
대속물로 인해 욥이 살았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대속의 의미는 희생입니다.
따라서 대속물에 대해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대속물의 희생입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옳은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신 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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